책 굽는 남자, 북티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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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수녀원에서는
여덟 개의 밥상에
열 명씩 앉아서 밥을 먹는데

어느 땐 서열 순으로
어느 땐 또 다른 방식으로
섞여서 앉기도 한다.

나는 요즘 5번 밥상의 큰언니인데
어느 날 내 축일을 축하해주는 카드에

어느 아우수녀가
‘수녀님과 한 식탁임을 기뻐하는 밥알들 올림’
이라고 적어준 게 인상적이었다.

사실 큰 공동체 안에 함께 살다 보면
밥알들끼리 서로 좋아해서 붙어 있기도 하지만

다름에서 오는 사소한 갈등과 아픔을 못 견뎌
갈라지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같은 집 안에서 함께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의 인내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귀한 인연일 것이다.

이해인, 「성자가 된 밥풀」 중에서
출처 <나를 흔든 시 한 줄 : 아프고 외로웠던 나를 지탱해준 청춘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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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녀들의 식탁에는 웃음이 그칠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설날은 밥알이 엉겨붙어 있듯 우리 삶의 순간들이 그렇게 엮여있을 시간입니다. 조금 더 손해보고 조금 더 참으라고 말하는 왕언니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할텐데 말이죠.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한 알 한 알 나누어져 다시 자신의 식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아쉬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조금은 미더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오늘 소개하는 책은 우리 시대 명사 55인이 뽑은 내 인생의 시 한 줄을 뽑아 그 시에 대한 인연과 사연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고은, 김훈, 이해인, 이외수, 도정일 등이 젊음의 고뇌와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제가 읽기에는 모두가 청춘처럼 살라는 말처럼 읽혔습니다.

오랫만에 ‘회춘하는 책’을 소개합니다~~^^
주말에 원래 사시는 곳으로 가시게 되면 새로운 해를 맞는 느낌으로 읽어보세요.

어른들은 책 한 번 읽고 한 살 어려지고
청춘은 이 책을 읽고 미래를 버티기가 조금 더 쉬워질 것같습니다.

남성 영웅의
길에 들어선
여성 영웅은
빈약한 기회,
저임금,
불충분한 보육 정책,
느린 승진 따위의

외적인 시련을 통과해야만

학위,
승진,
명망 있는 직함,
결혼,
경제적 성공이라는

혜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 장애물은
외부 세계의 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 영웅은 내적 정신 세계의 길에서
자기 의심,
자기 혐오,
우유부단,
무력감,
공포의 힘과
절대로 해낼 수 없다고 말하는
자기 마음속 악마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른다.

이런 식의 다툼은
여성 영웅의
명쾌한 사고,
자신감,
야망,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여성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의존성의 신화,
여성의 열등함에 관한 신화,
낭만적인 사랑의 신화를
깨부수는 일은 전혀 쉽지 않다.

“이 여정은 겁쟁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두려움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여정이다.”

모린 머독, <여성 영웅의 탄생 – 융 심리학으로 읽는 강한 여자의 자기 발견 드라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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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기혼이든,
미혼이든,
딸이든,
엄마이든
시어머니든,
며느리든,
시누이든,
올케든,
언니든,
동생이든

한국 여성들이
자존감을
가장 많이 잃을 때가
‘명절’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가족이라는 신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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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프게 판단하지 말고 섣불리 훈계하지 말자.
엄마는 절대 모르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아들의 속마음
아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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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지만 ‘말’로 만들면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너무 초라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노예 상태’라고 인정하면
지금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해질까요.

노예란 태어나서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삶을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들 중에 가장 자유가 덜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전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적극적 혹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꼭 ‘뭐’가 될거야.
‘뭐’의 노예~~!

뭐가 꼭 되어야 해? 그냥 살거야.
‘그냥’의 노예~~!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
‘남’의 노예~~!

튀지마!
‘평범’의 노예~~!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가치가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것이 되지 않을까요?

‘불안’을 걷어내려고
그 가치를 ‘믿어버리면’
노예가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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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남는 건 물건뿐이다.
그래서 나도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내가 이 세계를 축적하는지도 모른다.

죽고 나면 나의 물건들을 전부 합한 것이
내가 살았던 삶보다
더 큰 삶을 암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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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선물하는 날’입니다.

오늘 받는 선물은
‘특별히’
버려지는 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내 방에는 물건이 별로 없습니다.

‘이별하고 나면 그에게 받았던 물건들을 전부 합한 것이
그와의 추억보다
더 큰 상처가 떠오르는 아픔 때문에’

– 발렌타인, 북티셰의 저주

sigle valen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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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가 그저 노동시간의 나머지로
주어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여가의 ‘품질’ 또한 여가를 즐기는 비용,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가 시간 중에
소비하는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에 따라 달라진다.

여가의 품질이 여가의 가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여가의 가격이 여가의 품질을 규정하는
일종의 전도(뒤집힘) 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가의 품질 차이는 여가가 사용되는
공간의 차이로도 나타나게 된다.

나아가 품질이 서로 다른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는
여가의 공간도 분리되기에 이른다.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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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일이 끝나고나면,
멍하게 TV를 바라보거나
술을 먹거나
스마트폰 게임에 매달릴까요?

낮에 했던 일에 대한 생각에
계속 매달리기보다는

그냥 머리를 풀어놓고
아무 생각없이 지내거나
다른 데 정신을 쏟고 싶어합니다.

머리를 싹 비우고 싶을 정도로
하고 있는 일은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가 봅니다.

여가라는 시간을 갖고 있으면
뭔가 뒤쳐지는 것같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여가를 즐기더라도
그 이후에 해야할 일이나 공부를 생각해보면
여가는 없고 머리 속에 해야할 일과 공부만 쌓입니다.

그리고 여가에 가격이 붙어있으니
이젠 비싼 여가와 값싼 여가로 나뉩니다.

어떤 여가를 즐겼는지는
능력을 보여주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정신적이든 물리적이든 간에
정말 중요한 건
요즘 같은 세상에서 여가는
‘사치’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정말 편하게 쉬려면
시간과 돈과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불필요하겠지요.

여가의 조건은 우리 시대 행복의 조건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여가의 가격을 붙이기 전에,
여가의 품질을 논하기 전에,

여가는 ‘이미’ 비싼 것 같습니다.
‘행복’이 이미 희귀해진 것처럼…
P.S.
제 글이 뭐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냥 3분 정도 여러분에게 ‘여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게다가 가격은 ‘0’원입니다.
그렇다고 질낮은 여가가 되지는 않겠지요?

저는 매일 걷는 한 시간이 여가라고 생각합니다.
걷는 내내 머리 속에는 무슨 글을 써야 하나만 가득하지만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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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인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이 질문은 ‘자신의 직관을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그걸 알려면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지.
좀 서툴더라도 어떻게든 들어보려고 노력해야 해.

정답은 거기에 있어.
자신의 직관 말이야.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책을 뒤져가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을 만들어
제대로 실천했는지를 따지겠지.

하지만 결국 이 직관적인 느낌이 없다면 더 나아갈 수 없어.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 의미를 머리로 이해하려고만 들어서는 안 돼.

나는 그걸 직관에서 비롯되는
깊은 내면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어.

일종의 천부적인 능력이지.

사랑에 빠진다는 건,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것이 옳으니
이렇게 하라는 직관의 인도를 받는 걸 말해.

확실히는 몰라도 일단 보면 감이 오는 거지.
칼 필레머의 <이 모든 걸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
삶, 사랑 그리고 사람에 대한 30가지 지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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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때
하나 하나 이유를 따집니다.

하지만 사랑을 할 때는
무언가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빠져듭니다.

쇼핑 한 번으로 미래가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아예 한 사람의 미래를 묶어놓기도 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면
아무도 사랑에 빠지지 못할 것입니다.

뭔가 따져보기 시작할 때
사랑은 불가능해집니다.

일단 ‘화~악!’해놓고 후회하는 것이 사랑아닐까요?

후회는 모두가 합니다.
후회없는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신의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에 빠질 때 이것 저것 따져서 사랑을 하더라도 후회를 합니다.

연애를 해봤더니 연애 전보다 훨씬 더 좋고
점점 괜찮아진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아지든 후회하든 이것은 사랑 후에
드디어 따지기 시작하면서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하는 평가입니다.

직관적으로 좋다 싫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습니다.

연애를 하는 과정에
직관적으로 좋다 싫다를 생각하는 순간은
이별의 순간일 것입니다.

사랑이 그렇듯
이별도 직관적일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직관’을 논리로 만드는 것이 결혼이라는 ‘제도’입니다.
사회적인 비판과 법적인 규제를 통해 관계를 만듭니다.

그래서 사랑은 직관이지만 결혼은 논리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이 둘은 다른 결을 가지게 됩니다.

결혼한 사람들한테 사랑을 들이대거나
혹은 사랑으로 평가하는 것은 의미없거나 쓸모없는 일입니다.

사랑은 그냥 너무 좋은 ‘상태’ 즉 ‘결론’이지만
결혼은 논리적으로 따져봐야 하는 ‘결정’입니다.

그 때문에 사랑의 후회와 결혼의 후회는
완전히 다른 질적인 차이를 갖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혼용해서 생각하다보니
생기지 말아야 할 문제도 생기곤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냥’해도 결혼은 ‘따져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결혼은 같은 선상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은 결혼을 원하지만 (배타적인 소유를 위해서)
결혼은 사랑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소유관계는 사랑을 앞섭니다)

부부가 되신 분들은
사랑하는 중이 아니라
아마 ‘결혼한 중’일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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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말했다.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풍이 있는가?’

나를 멸망시킨다는 건
바로 지금까지의 나,
자아 혹은 자의식의 성채를 무너뜨리는
힘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 순간,

‘신체의 역동적인 복합성’이 만개하게 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에 빠지면 우리의 신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쟁과 평화를 경험한다.

혹은 들개처럼 날뛰기도 하고,
혹은 뱀처럼 똬리를 튼 채 독을 내뿜기도 한다.

그야말로 나 자신과의 전면전이 벌어진다.

이런 식의 폭풍을 체험할 수 있다면,
가히 운명적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터.

사랑을 통한
존재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누구나 일생에 한두 번은
이런 심연의 폭풍을 경험한다.

문제는 그 절호의 찬스를
그냥 흘려보낸다는 거다.

사랑이라는 걸
대상의 문제로만 접근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받아 주는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등등에만 골몰하는 것이다.

요컨대,
오직 최종적 결과,
즉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까, 없을까?
에만 집착한다.

따라서 거기에선 존재의 전이가 일어나기 어렵다.

존재가 뒤바뀌는 체험을 하려면
폭풍 자체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폭풍이 내 몸의 세포조성을
전면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도록 몸을 맡겨야 한다.

고미숙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 혁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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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는 정신의학에서
환자를 상담하던 의사에게
환자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몸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전염처럼
정신적으로도 ‘전이’가 일어나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녀)가 나에게 ‘쾅’하고 부닥쳐 왔을 때
우리의 세포는 하나씩 살아나서
이리 저리로 옮겨다니며
새로운 위치를 잡습니다.

‘전이’를 통해 내가 바뀌어갑니다.

외부의 충격이지만
내 안에 새로운 힘으로 나타나서
나를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합니다.

그때 착각이 생깁니다.

내 안에 생긴 폭풍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영역에 생겨나는 힘입니다.

그(녀)가 만들었지만
내 안에 새로이 변형되서 ‘내 것’이 됩니다.

또한,

사랑이라는 심리적인 충격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전까지 없었던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라거나
두려워서 도망가거나 다시 원래 모습으로 가려고 합니다.

정신도 관성이 있다보니 예전 모습을 지키려고 하지요.

이런 ‘착각’과 ‘관성’을 통해
자신의 변화에 대해 상대방의 탓을 하고(다 너때문이야!)
‘과거의 나’를 있는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합니다.(예전에 더 행복했다고!)

내 안에 새로 생긴 힘은 이제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모습인 ‘나’에게도
적응이 안되는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면?

결국 사랑은 주인을 잃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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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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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 부족한 곳을 채워주거나(결핍)
내가 원하는 사람입니다.(갈망)

연애를 하는 이유는 어쩌면,
빈 곳을 채우거나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빈 곳을 채우려고 하지만
그 곳은 너무 커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갖고 싶은 것은 더 많아집니다.

다 채우지는 못하지만
포만감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조금씩 차오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
어느 방에 문을 열어보면
아무리 채워도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남친이나 여친이 채워주지 못하는 곳.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도 마찬가지로 없어져버립니다.

가만히 그 문에 손을 대고
그(녀)도 내 문에 손을 대고
안에서 느껴지는 ‘빈 공간’의 소리를
손으로 느낄 때 전율이 느껴지면

그때,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채우려 하지말고
빈 곳을 느끼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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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러허가 구축한 내러티브는
단순하면서도 흡입력 있고,
아주 재미있었다.

새로운 항공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는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우리는 여러분의 짐을 사랑합니다.
가방은 공짜로 날아가요”라는
문구로 유명한 무료 수하물 서비스,

무료 음료 및 땅콩 서비스에서 가져온
“사우스웨스트의 땅콩(또는 괴짜들-Nuts)에 대하여”라는
이름의 블로그,

“흡연은 비행기 날개 위의
스카이라운지를 이용해주십시오.
그곳에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상영 중입니다”라는
기내 금연 안내,

“직원이 첫 번째고, 고객은 그다음이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직원을 웃게 하는 회사, 고객을 즐겁게 하는 직원’의 신념과
LUV라는 이름의 주식 종목명 등

켈러허의 ‘Fun 경영’은 지금껏 이어지는
사우스웨스트의 전통이 되었다.

그곳 직원들은 여전히 그가 제시한 비전을 되새기고 있다.

조셉 맥코맥이 쓴 <브리프brief, 간결한 소통의 기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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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티우스Horatius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간결하게 쓰려고 애쓰다가 모호해진다.”

길게쓰면?

아예 안읽거나 혹은 오해가 생깁니다.

요즘 제 고민입니다.

‘어째야 하나?’

이번 주는
조금 더 단순하게 쓸 방법을
꼭 찾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번 주에 무엇을 찾을 생각이신가요?
짧게 말하는 방법 어떠세요?

대신 웃기셔야 해요. ㅋㅋㅋ

그냥 짧게만 말하시면 사람들이 걱정하거나 의심합니다.

짧게 웃기는 사람이 되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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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버튼이 엘리자베스를 두고 한 말,

“당신의 몸은 기적의 작품이다”

얼마후에 한 말은
“당신은 너무 뚱뚱하고 다리는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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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첫번째 남편인 콘래드 힐튼 주니어를 두고 한 말,
“그는 나를 한 명의 여자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이해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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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후 한 말,
“ 그와 결혼한 후에 나는 장미빛 안경을 잃었다.
몸무게가 줄었고 간신히 유아용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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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 헤이워스가 네번째 남편인 딕 하임스를 두고 한 말.
“나는 지구 어디든 그를 따라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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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후
“난 그가 어디있는지 모른다 – 그리고 관심도 없다”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근원적 성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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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길입니다.
세상에 다시 없을 사람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이 고난한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과정은 실망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기대하고 관심이 늘지만 그만큼 상대방이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문 용어로 ‘참아준다’고 하죠?

아마…

사랑에 빠져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참을 게 많아진다는 의미일지도요.

‘인내’가 죽어버린 ‘사랑의 시대’를 살 때는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비호감이 가득한 사람을 만나서 호감을 찾아가던가.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할 것입니다.

이 말은 원하는 사랑은 못한다는 말일지도요…

마음을 바꿔 보는 건 어떨까요?

‘원하는’ 사랑, ‘기대하는’ 사랑말고
‘그냥’ 사랑을 해보는 건?

그냥 사랑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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