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굽는 남자, 북티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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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주민들 반응이 저런데,

끼니를 비스킷으로 때우고
모기와 온갖 벌레에 뜯겨가며
땡볕 아래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먹으면서 일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속상하고 야속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새삼 이 일을 시작할 때 들은 말이 생각난다.

‘죽을힘을 다해 도와주면서도
욕먹는 걸 잘 견뎌야 구호 일을 계속할 수 있다.’

구호 현장의 백전노장인
우리 회장과 지역 총책임자는
언성 한번 안 높이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난 아직 멀었나 보다.

한비야의 <1그램의 용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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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힘들어 도와주는데
도움을 받고 화를 내면
앞으로는 쳐다도 안보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사실 도움은
주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받아줘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한 일인데
누군가 도움을 받았다고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본전 생각과
서운한 마음은
당연한 인간의 마음처럼 보입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거래’를 한 것 아닐까요?

세상사 힘들다고
그냥 ‘남한테 피해안주고 나만 잘살자’로
결론을 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고 사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리고 거래 밖의 관계를 많이 만들수록
행복지수는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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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을 때는
죽을 것처럼 사랑하고,

곁에 없을 때는
심장에 동판화를 새기듯
그리워하면 될 일이다.

사람이 시를 쓰는 이유는
마음을 숨겨둘 여백이
그곳에 많아서다.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글이나 말보다 그리움을
숨겨둘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워한다는 것은
과거부터 미래까지를
한 사람의 일 생 안에
담아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워하면 할수록
마음의 우주가 팽창한다.

림태주, <이 미친 그리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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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가득 찬 것처럼 생각하는 것.

책상이 없다면
책상을 상상하고

배가 고프면
빵을 그립니다.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합니다.

작가는 그리움을 우주만큼 키워야
드디어 ‘상징’을 만들어냅니다.

그렇지만 실제는 아무것도 없다는
철저한 현실 인식을 하고 나면
그리움이 외로움으로 바뀝니다.
결국 괴로움이 됩니다.

그리움, 외로움, 괴로움…

이 3종세트를 먹고
작품은 자라납니다.

오직
작가만이
그리워하던 대상을
자신의 상징과
바꿉니다.

그러는 동안
작가는 소진됩니다.

사실,
자신을 잊는 것이지
그리움이 바뀌지도
채워지지도 않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옆에 없는 당신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다 쓰고 나면
해왔던 일이
온통 소용없어집니다.

‘당장’
‘눈 앞에’
‘당신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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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살의 봄,
스미레는 난생처음 사랑에 빠졌다.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며
돌진하는 회오리바람처럼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가는 땅 위의 형태가 있는
모든 사물들을 남김없이 짓밟고,

모조리 하늘로 휘감아올리며
아무 목적도 없이 산산조각 내고
철저하게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고삐를 추호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가로질러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무너뜨리고,

가련한 한 무리의 호랑이들과 함께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폭풍이 되어
어느 곳엔가 있는 이국적인 성곽 도시를
모래 속에 통째로 묻어버렸다.

그것은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열일곱 살 연상으로, 결혼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그것이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이자
(거의) 모든 것이 끝난 장소였다.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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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은 싫습니다.

소설이 끝나고 나면
다시 파멸이 시작될 것 같거든요.

‘오래 오래 행복했답니다’는
고전 동화의 말이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동화의 꿈이 깨져가는
시간을 ‘성장한다’고 합니다.

잔인한 결말이 예상되는 사랑은
그래서 청춘에게만 허용됩니다.

다른 삶을 살아볼 기회가 주어지기때문이죠.

그렇지만
파격과 파괴가 없는 사랑은

냉동고에서 꺼낸 찐빵을 바로 먹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북극에서 뜨거운 찐빵을 먹어야 할텐데요.

열정적인 사랑을 끝내고나면
두려움에 누구 앞에서도
사랑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 상처와 두려움은
장벽이 되어버립니다.

그 건너편에 봄날이 있을지
전쟁터가 있을지 모르기때문에
넘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그 벽을 넘고 싶습니다.

단 하나의 내가 남지 않더라도요.
p.s. 하루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사랑 소설은 별로 쓰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보면
사랑에 대해 가장 잘아는 소설가인 것 같습니다.

월트 디즈니가 10대의 사랑을 만들었다면
20대의 사랑은 하루키가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 존경하지만
하루키에게 사랑을 배운 여자랑
연애하기는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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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예요,

차 나를 때
절대 손님을
사람으로 안 보거든요.

내 열아홉에

어쩌다가
쟁반을 들게 됐는데
그때 살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었어요.

아, 옛날 생각하니까 꿀꿀해지네.

뭐 지금도 역시
손님을 사람으로 안 봐요.

그런다고 돈으로 보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짐승으로도 안 봐요.
그냥 사람으로 안 볼 뿐이에요.

뭐라고 그래야 될까.

암튼 그냥 나는 찻잔을 나르는 거거든요.
배달 많은 날은 하루에도 사백잔을 날라요.

뭔 맘이 있겠어요.”

전성태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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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받은 바르가스 요사는 소설은
현실을 비판하고 꿈을 벼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입니다.

자동화 기계가 도입되고
아웃소싱이라는 이름으로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고
비정규직은 인구의 반을 차지합니다.

일자리는 줄고 줄어갑니다.

남아있는 일자리는
10년간 19%나 줄어든 대기업 일자리와

기업을 대신하여 욕을 먹어야 하는 감정 노동자들과

자영업자에게 속하여 저임금 노동을 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입니다.

이들은 청춘이며, 엄마이고, 아빠이며, 삼촌과 이모들입니다.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사람으로 볼 수 없고
감정이 사라진 생명들이
아무 느낌없이
신세 한탄도 없이

없이, 없이 살아갑니다.

우리도 아무 의식없이 자동으로
감정을 없애고 살아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다방의 커피 배달부처럼 말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웃어야 하고
정해진대로 손과 발이 움직입니다.

먹고 사는 일에서 감정을 제거하고
무의식적으로 일하는 상태.

감정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갖는 것은

아마도
‘무감정’일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 …

소설가 전성태는
현실과의 긴장감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어떤 단락을 드러내어도 시가 되는 소설가,
전성태의 단편 소설집입니다.

그 전의 어떤 소설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려는 그의 노력은
바르가스 요사가 후배들에게 부탁한 소설가의 풍모를 유지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있는 그대로의 삶과 만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전성태의 <두 번의 자화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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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브리티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강권하는 미디어와 세계’에 대하여
세상을 운영하는 자들은
이 꿈을 마약처럼 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출신에 허락된
꼭 그만큼의 현실을 살아나가야만 합니다.

물론
전과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언제든지
셀러브리티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환상이 존재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

이 마약과도 같은 낙관은,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찰나의 경우로 존재하는
일말의 어떤 아름다움들은

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추악함에 대해
솔직히 말하는 사람들은
아쉽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는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거짓 낙관 없이도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허지웅의 첫 소설,
<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의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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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나온 시들을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100년 중의 반을 전쟁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낮만큼이나 어둠을 노래했기때문입니다.
조금 덜 칙칙한 시인들은 회색을 노래합니다.

꼭 전쟁이 없더라도 인간은 이 두가지를 다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꿈과 희망, 긍정, 밝음이라는 단어들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다음,

사람들은 언제든 자신의 어둠을 덮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 쪽 모습으로 거리를 걷습니다.
옆을 가리든, 위를 가리든 가린 모습으로 걸어다닙니다.

‘셀러브리티’는 유명인 정도로 이해되지만
원래의 뜻은 태어날 때부터 잘난 사람들입니다.

태어나면서 밝음과 어둠을 같이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밝은 부분만을 보였을 때 우리는 부러워합니다.

이것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두번째 탄생입니다.

어둠을 떨기고 밝음만을 남깁니다.

그렇지만 진실은 밝히기 싫어하는 쪽에도 있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사랑하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상처를 담고 살게 됩니다.

어둠을 드러낼 때,
어둠을 인정할 때…

그 때가 되어서야 진정,
스스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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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지 않아서’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나서 젊은 시절의 기억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추억들이

다 재산이고 보물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조금 아연했다.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내 모든 사랑한 기억들을
억지로 지워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남은 그 재산과 보물들을
모두 잊어버리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게 날선 유리조각처럼
생채기만 남길지라도

언젠가 세월이 지나면
그 순간들도 닳고 둥글어져

빛나는 보석처럼
남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겼다.

그리고 글을 쓰고
생각을 더듬으며
분명히 나는 아팠다.

그리고 행복했다.

이별의 아픔과 상실 앞에
그동안 나는 내가 그들에게
충분히 사랑받았음을 망각하고 있었다.

팜므팥알의 <연애의 민낯 : 순정은 짧고 궁상은 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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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홍대 앞 카페 앞에서
‘팥알’을 3년 만에 만났을 때,

잊고 싶은 기억이 한 번에 떠올랐습니다.

책을 냈다고
가방속에서 꺼내

내게 주었을 때

그 얇은 책에
그 무거운 가격을 보며

돈을 꺼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는
연애안하겠다고
한 결심처럼

절대 사지 않으려고 했던
‘팥알’의 연애 스토리 책을 사고 말았습니다.

(‘팥알’과 연애하는 건 절대 아니니 오해마시길 ㅜㅜ)

서로 못만나는 동안
다른 곳에서 누군가와
이별했다는 생각에
왠지 반가웠습니다.

근데 이게 반가워할 일인지는…

봄날에 대한 기대를 허물어버리려는 듯,
겨울을 숨겨놓은 날입니다.

이별에 대한 기억과 애잔함도
봄 속 숨겨둔 겨울처럼
날카로운 칼날처럼
피부를 스칩니다.

깊지도 얕지도 않게
생명을 끊지는 않지만
고통은 그대로 유지시킨 채 말입니다.

사람이 사계절이라면
겨울 다음에 봄이 와야 할텐데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겨울, 겨울…

그래서 봄 속 겨울보다는 덜 춥습니다.

 

설렘북스배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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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받는 대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다 털어놓는다.

스마트폰이 고문실을 대신한다.
빅브라더는 이제 친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빅브라더의 친절함이
감시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만든다.

벤담의 빅브라더는 보이지는 않지만
수감자들의 머릿속에 편재한다.
그들은 빅브라더를 내면화한다.

반면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아무도 감시받거나 협박당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시국가”라는 용어는
디지털 파놉티콘을 지칭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감정,
오웰의 감시국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유의 감정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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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빅브라더는 감시자를 말하고
파놉티콘은 감옥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감시센터를 말합니다.

벤덤의 빅브라더가 내면화 한다는 것은
수감자나 감시 대상자가 스스로 감시자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알아서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치즘이 만연했던 90년 전 독일은
사람들 한 명 한 명 안에 히틀러가 살고 있었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의 신민들은 모두 자유가 없고 답답합니다.
완벽하게 빅브라더가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하고
벗어나려는 연인이 결국 다시 빅브라더의 흉계에 의해
사랑이 깨지고 인간성이 상실되는 암울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감시자는 완벽한 감시 시스템을 갖추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감시받는 사람은 안보여주거나
혹은 원하는 것만 보여주려 노력하기때문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자유는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감시자의 입장에서는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놓게 됩니다.

자유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숨길 수록 강화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신비주의’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신은 무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예인과 정치인은 끊임없이 감추거나
보여주고 싶은 것만 드러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벽하게 감시 대상자가 되고 통제 대상자가 되니까요.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투명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국민과 소비자가 자유롭고 그들이 자유스럽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지요.

결혼하면 서로에 자유가 없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일상에서 뻔히 보이기 시작하면서 입니다.

북티셰 생각 –

p.s.

곧 북티셰에서 오프라인 책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시간되는 대로 말로 하는 책소개를 해보려구요.

원래 있지도 않지만 ㅜㅜ

얼마 안남은 ‘신비주의’가 없어진다는 게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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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미술가들이 매년 자신의 최근 작품을 알리는
파리 살롱에서는 출품작 5,000점 가운데
3,000점에 가까운 작품들이 심사에서 탈락한다.

이 때문에 항의가 빗발치자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관대함도 과시할 겸
이른바 ‘낙선전’을 허락하는데,

사실 그 목적은 ‘불량한’ 그림들에 대한
심사위원회의 결정이 옳았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기획은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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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전은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가 되었고,
그 가운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당시 제목은 <목욕>이었다)는 단연 큰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은 정장을 한 두 남자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거나 분노를 표했다.

더구나 이 여인은 관람자를 경멸하듯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 그림은 조르조네의 1510년작 <전원의 합주>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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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마네는 조르조네의 여신과 음악가들을
동시대 인물들로 대체했다.

보수주의적 도덕에
어긋나지 않는 신화적 주제의 누드를
그리는 것만을 허용했던 기준을 깨고,

그림 속 풍경을 ‘섹스 파티’의
현장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카롤린 라로슈의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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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전은 프랑스 인상파의 탄생을
알리는 전시회였습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기록된 신화와 역사를
그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그림 형식에 들어있던
모습을 강력하게 부정합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풍경을
그림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이때만해도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을 그렸지만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화가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것도 그리고

신화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일상 속에 모든 것을
드러내어 작품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일상에 파묻힌 우리를 비웃습니다.

그림을 보는 우리가 참기 힘든 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탈출할 수 없는 세상의 한계일 것 같습니다.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의 상상을 거울로 만들어
우리를 비춰보는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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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시시각각
거부당하는 순간과
받아들여지는 순간은 찾아든다.

알에서 부화해
알껍데기를 평생 이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우리는 그런 순간들을 늘 짊어지고 살아간다.

저 멀리 마르코가 보인다.

그는 오렌지 두 개를 들고 서 있다.
만져보지 않고도 그가 느껴진다.

나는 걸음을 멈춘다.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고요히 낙하하는 세상을 붙잡고만 싶다.

사이먼 밴 부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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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은 추억이 됩니다.

장면으로 남아있는
그 시간을 우리 뇌는
기쁘게 혹은 야속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구석에 쳐박혀버린
기억 중에 몇 장면을
떠올릴만한 봄날입니다.

고요히 낙하하는
마음을 붙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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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선물이 있었다.

원형적인 세상의 시작,
우리 삶의 시작,
인류의 시작에
선물이 있었다.

따라서 감사는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감정이다.

굳이 더 설명하자면 ‘선물을 받았다는 느낌과
그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초창기 인류는
그런 원초적 감사의 감정을
사회적 경제적 관계 속에 구현했다.

돈의 역사에 대한 기술은
대부분 원시적 물물교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물물교환은 비교적 드문 일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경제적 교환방식은 ‘선물’이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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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인류가 탄생부터
약육강식에 의한 적자생존에서
살아남은 생명체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경쟁력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원시부족부터 이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뺏고 죽이고 거래하는
권력과 계산의 관계는

어쩌면

아주 최근의 인류가
만들어낸 발명품일지 모릅니다.

원래는
같은 지역에 살며
서로 가진 것을 ‘선물’하며
사는 생명체였습니다.

돈이나 금은
그 자체로 먹을수도 없고
쓸모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돈을 통한 거래가 초기에 있기는 했지만
선물을 주는 경제가 훨씬 더 발달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돈을 통한 ‘교환관계’를
발전된 체계이며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혹 이 ‘상식’이 오류일 수 있지 않을까요?

선물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지만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가격이 붙지 않은 물건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가격이 없는 선물은 이제 점점 가치를 잃어갑니다.

주는 기쁨과
받는 고마움이면 충분하고
꼭 준 사람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의 경제학 어떠세요?

우리가 살아왔던 과거는
교환해야 가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증여 즉 ‘주는 행위’ 하나로 가치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측정할 수 없는 마음 속에 생겨납니다.

돈을 통한 거래보다
마음을 통한 선물교환이

어쩌면

‘오래된 미래’ 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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