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굽는 남자, 북티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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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 합일, 친밀감을 바란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충족되지 않은 욕망이다.

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이런 상품을 소비하는 데서 만족을 찾는다.

연인과의 관계에서
분리의 벽을 허물 수 없었던 남자와 여자는
스크린 속 연인의 행복한 또는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에 참여할 때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많은 연인들이 스크린 위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이야기를 구경할 때

서로 사랑을 주고받지는 못하지만
함께 다른 사람의 ‘사랑’의 구경꾼으로서
사랑을 경험하는 유일한 기회를 갖는다.

사랑이 백일몽인 한,
그들은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실재하는 두 사람 사이의 현실적인 관계가 될 때,
그들은 얼어붙는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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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즐기고 재미있게 보내기.

맛집, 영화, 술, 여행, 기념일.

좋은 것을 같이 ‘하는’ 것일까요?

아님 좋은 것을 같이 ‘쓰는’ 것일까요?
‘소비’라는 매개없이

아무런 데이트를 즐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소비가 주인이 되고나면

데이트의 주인공은 하인이 됩니다.

소비에 끌려다니는…
그렇게 ‘사랑의 상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연인관계일지도 모릅니다.
연인들이 쓸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들은 진공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서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잘 안맞나봐’

사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소비했지만

유일하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은
‘서로’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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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凍死者)가 얼어 죽을 때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 / 슬픔이 기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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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저에게 남았던 단어는 ‘연민’이었습니다.

누가 책임져야 하며,
누가 잘못했는지는
최소한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아플 때
아파하지도 못하고
자기의 영역안에서만
상처받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 학습된 ‘감정의 폭’을 넓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사람 사는 것 다 그렇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토가 나오는 것을 한참 참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 참배를 하러 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으로 죄책감을 때우기에는
제가 너무 한심했기때문입니다.

사실 그 이유때문에 글을 써서
사람들과 같이해보자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북티셰의 탄생 설화입니다.

이 상식적인 연민이
몰상식의 망각안에 갇혀…

그렇게 고여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할 것은
‘슬픔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마음,
이것으로 충분히 세상은 바뀌지 않을까요?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소설이
상상력을 촉발한다는 주장은
상상력이 사회현실의 일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피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어쩔 수 없이 확인시킨다.

반대로 자기계발 문화는
텍스트와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이런 식으로 처신하고 반응하면 된다고
어떤 처방과 행동 지침을 제공하는 게
자기계발 문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여성을 겨냥해 쓰인
대중문학과 문화상품의 상당 부분이
본래 자기계발 양태의 논리에 따른다는
논제를 주장하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여성 잡지,
각종 자기계발서,
연애소설,
토크쇼 등은
자기계발 논리에 따르는
상상을 제공함으로써
치료나 정신건강 목적의 지침
혹은 안내를 제시하면서
개인으로 하여금 방향을 잡게 해주는
일종의 도구상자와도 같다.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불안한가 – 하드 코어 로맨스와 에로티즘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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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는 방법, 이별 후 덜 아픈 방법, 이상형의 남자랑 연애하는 방법 등이 보통 자기계발의 논리입니다. 이것을 스토리에 담아서 우리는 드라마나 잡지, 로맨스 소설을 봅니다.

미디어는 이렇게 여성을 상대로 하는 수많은 논리들을 상자에 넣습니다. 그리고 못을 박을 때 망치를 꺼내는 것처럼 이별하면 사용하는 말들을 꺼내서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나면 치유가 되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일을 하고 일상을 유지하는 여성으로 끌어옵니다.

현실을 바꾸고 피하는 ‘상상’은 그 도구에게 힘을 제공합니다. 상상이 달리면 망치가 아니라 드릴이 됩니다. 손쉽게 ‘드르륵’하고 못을 박을 수 있습니다.

온갖 ‘말’들이 들어가있는 도구상자에서 도구를 고르는 기준이 바로 ‘공감’입니다. 모두들 슬퍼도 기뻐도 그 말을 발견하면 ‘유레카!’라고 외칩니다.

“맞아, 이거 내 이야기야!”

근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굴로 들어갔던 것처럼 사람들은 그 도구상자 안으로 들어가버립니다.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그리고 실제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꿀맛은 나지 않는데 온통 꿀처럼 느껴지는 말들에 갇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의 모든 말들은 ‘다 너를 위한 거고 이 말을 들으면 행복해지고 성공할거야’라고 외칩니다. 그러니 누가 그 말들을 피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말들만 나오는 상상을 합니다. 이제 상상은 문장이됩니다. 상상은 말이 안되야 하는데 상상이 말이 되버립니다. 그리고 눈 앞에 현실로 나타납니다. 얼마나 달콤한지 이제 아플때마다 상자를 열지 않아도 상자 안에 있기에. 있는 그대로 내 몸안에 흘러다니게 됩니다.

‘누가 꿀단지를 나오고 싶을까요?’ 결국 곰돌이 푸우가 되어 그런 캐릭터가 되어 살게 됩니다. 그 상자를 나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결국 이 자기계발식의 언어적 상상은 해결책이 아니라 ‘중독’을 만들게 됩니다. 담배나 마약보다도 더한 중독이 됩니다.

그 ‘말’들을 버리고 상자밖으로 나오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절 찾아주세요~~^^

p.s.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한 저자가 두 명 있습니다.
한 명은 돌아가신 ‘한나 아렌트’랑 요즘은 ‘에바 일루즈’에 푹 빠져있습니다.
정말 에바같은 여자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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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여를 주는 직장에서 벗어나 일을 하는 사람은
무시당하거나 조롱거리가 된다.

인간의 자율적 행위는
고용수준을 위협하고,
사회적 일탈을 일으키며,
국민총생산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부적절하게 불리는 ‘노동’일 뿐이다.

노동은 더 이상
인간의 수고나 노력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적 투자와
어울리지 않게 결합된 기괴한 요소를 의미한다.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가 느낄 수 있는 가치의 창조가 아니라,
주로 사회적 관계인 직업을 의미한다.

무직은 자신과 이웃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자유라기보다는
슬픈 게으름이 되었다.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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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렌서가 되어도
돈을 주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일해야 합니다.

사람은 여러 종류의 일과 노동을 하지만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돈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을 써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굶어죽는 상황이 됩니다.

즉 생존이 돈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돈으로 살아야 한다면
돈을 가져오는 ‘노동’만을 해야 합니다.

회사원이든,
프리렌서든
돈을 벌어야 하는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돈을 주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주는 돈 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돈을 줍니다.

이것을 ‘자본주의’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돈을 주어 일을 시켰는데
돈을 더 못벌어오게 되면?

우리는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더 많이 벌어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더 받습니다.

돈을 주고 일을 시켜 돈을 더 벌 수 있다면
우리가 돈을 주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회적인 가치’나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일들
혹은 하고 싶은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오직 ‘돈’만이 목적이라면
‘돈을 주는 사람’
즉 사용자가 되어야겠지요.

하지만 리스크도 많고
시장 환경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다보니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무직은 범죄가 되고
실업자는 살인죄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이런 사면초가를 우리는 ‘자본주의’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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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階生白露 옥계생백노
夜久侵羅襪 야구침나말

却下水晶簾 각하수정렴
玲瓏望秋月 령롱망추월

옥 계단에
흰 이슬 내려
밤 깊어
비단 버선을 적신다

돌아와
수정 발 내리고
영롱한
가을 달을 바라본다
옥계원(玉階怨)-이백(李白)

참고 : 이백시선 / 이원섭 편역 (현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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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알콜릭 시인이

천재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수 천번을
퇴고했다는 두보와 다르게
한 번에 써내려가는 시인.

그는
우리 마음 책상에
가만히 꽃 한 송이 올려놓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집에
두보 시집과
이백 시집이
한 권씩 있다면

당신은
이미
구름을 타고 땅을 볼 수 있고
봄날 새싹이 움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옥계단을
눈을 감고 떠올려 보세요.
대신 순서를 잡아야 합니다.

보름 달빛이 비추고
집은 이미 캄캄한 빛으로 바뀌었지만

달빛에 반사되는
흰 옥 계단이 어른거립니다.

너무 예뻐 발하나 올려보지만
차가운 옥 계단 위로 이슬이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발틈으로 올라오는 물기가 버선을 적시고
옥계단에 기대했던 마음은 서운해집니다.

젖은 버선을 벗으러 집안으로 들어와서
수정으로 만든 발을 치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영롱한 달빛에
서운함을 잊습니다.

빛은 옥과 수정을 통해
새로운 색깔을 띄웁니다.

p.s.

지금 이백이 살아있으면
아마
백화점 명품관에 있겠지요?

옥으로 계단을 만들고
수정으로 발을 짜고
비단으로 만든 양말을 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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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준 넥타이 안 하네.”라고
그의 생일에 선물한 넥타이에 대해 물었더니
그가 “이거 아니었나?”라며,
그날 매고 있던 전혀 다른 넥타이를 말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충격을 두 배로 받았을 것입니다.

남성은 ‘사물’과 ‘감정’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선물은 기쁜 것이지만,
몇 개월 지나면 그것은 그냥 넥타이일 뿐입니다.

처음 몇 번은 그녀 앞에서 매지만,
그 후에는 여러 넥타이 중 하나로 여길 뿐입니다.

물론 그녀에게 넥타이를 받은 사실은 확실히 기억하지만,
그것이 어떤 넥타이었는지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최악의 경우
어느 것이 그녀에게 받은 것인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한편,
여성은 ‘사물’과 ‘기분’을 더해서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그에게 목걸이를 선물로 받으면
받았을 때의 기쁨에 더해 특별한 목걸이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액세서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잊을 수 없으며,

디자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목에 거는 것만으로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합니다.

그러므로 남성이
당신에게 받은 선물을 하지 않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 속에 이미 스며들었기 때문에
데이트에서는 볼 기회가 없을 뿐입니다.

네모토 히로유키, <왜? 나보다 못한 여자가 더 사랑받는 걸까 – 그녀는 알고 당신은 모르는 남성공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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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입니다.

‘그냥 원래 다 그래!’라고 말하면
말하는 나는 편하지만 그 이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그냥 원래 다 그런 사람’이 되기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정확한 표현은 ‘나와 조금 다르네요’가 맞습니다.

그래도 일반화할 수 있는 요소들이 없다면
‘연애학’이라는 이 신종(?) 학문은 나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뉘앙스는 약간 ‘혈액형학’과 비슷합니다.
근거는 없지만 ‘그래 그래!’라고 맞장구치는…

그래도 이것도 이론이다보니…
실천을 해봐야 정말 맞는 이야기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애 관련 글과 연애 관련 사진과 글들에
공감이 갈 때,
그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공감’은 쉽게 판단하는 가장 좋은 근거가 됩니다.

판단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내가 가진 상자에 우겨 넣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공감은 하되,
판단하지 않는 것.

특히 연애할 때 필요한 것이 아닐런지…

연애가 힘든 사람들은
‘상대방’보다 ‘나’를 더 믿는 사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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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
그 뒤에는 반드시
‘평가’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가능한 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나보다 잘났거나,
훌륭한 사람과는
비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비교해봤자,
내게 남는 건 씁쓸한 기분뿐이거든요.

김원의 <봄날을 지나는 너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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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동창회만 갔다오면 기분이 나쁠까요?

오랫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기쁨은 잠시,
헤어질 땐 비참해지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 머리 속에는 정보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습니다.
그 창고는 단층이 아니라 빌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 친구는 3층,
이 친구는 5층,
쟤는 팬트하우스…

이렇게 사람을 층별로 나누어 넣어놓고,
만약 내가 ‘지하층’에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확 나빠집니다.

자연스레 사람을 세로로 줄을 세우고
자신도 한 층을 골라 들어갑니다.

반대로 내가 고층에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을 걱정해주게 됩니다.

그럼 아래층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아주 기분이 나빠집니다.

머리 속 빌딩을 무너뜨리는 건 어떨까요?

단층으로 만들어서
‘옆집 사람’으로 만들어야
우정도 인간관계도 편해집니다.

“이번에 삼성 들어갔다며?”
“아들이 서울대갔으니 술한잔 거하게 사야지.”
“그 일 하지말고 내가 자리하나 알아봐줄테니…”
“프라하 좋더라. 지난 달에…”

이런 말들이 횡행하는 자리에서
추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말며,
남의 이야기에 의견을 함부로 붙이지 말며,
설혹 기분이 나빠지게 되면
나도 누군가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자랑 많이 하는 사람들은
내가 기분나빠하는 것을 보며
나 보고 열등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열등감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열등한 부분을 숨기고
우월함만을 드러내는 거지요.

남들 보라고~~^^

이렇게 쌓여가는 열등감 속에 살지 마세요~~^^

남들이 뭘하든
흠뻑 축하하고
같이 슬퍼하고
그가 하는 것을 응원해주세요.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의 윗층으로 올라가면?

‘더 많은 윗층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욕심은 계속됩니다.

이것이 천 억 부자가 더 많이 가지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p.s. 사랑시 올린다고 제가 연애하는 건 아닙니다 ㅜㅜ
항상 말씀드리지만 제가 연애를 하면(불가능하겠지만ㅜ)
북티셰에 올라오는 글은
다 철학아니면 경제학 뭐 이런 것들로 꽉 채웁니다 ㅋㅋㅋ

사랑을 못하니 사랑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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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메리 올리버, <휘파람 부는 사람 : 모든 존재를 향한 높고 우아한 너그러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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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안그러려고 벽을 쌓아도
결국 나 좋다고 계속 표현하는 남자에게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게 관심을 줄거면 계속 좋아해 달라고
오래 오래

나만…’

페북에서 본 글입니다.

이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뜻하고는 싶지만 날 태우지는 않겠다.’

이 우주가 저에게 준 ‘질문하는 능력’이 필요해지더군요.

“나를 태우지 않는 사랑도 가능할까?”
“열심히 불을 때서 젖은 나무를 말려놨더니, 불을 다른 곳에서 피우면?”
“오래 오래 태우다가 나까지 타 버리면?”

속좁은 남자의 ‘본전’ 생각일까요?
아님,
쓸모없어져버리는 자신을 참지못하는 ‘자괴감’때문일까요?

저런 질문을 하다보면 ‘안해 안해 안하고 말지.’라고 말하게 됩니다.
저 해답을 찾기 위해 날 불태우는 건 참…

이 우주는 우리에게 더이상 선물 줄 생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사랑도, 질문도…’

채플린에게는 모든 칭찬이 무색하다. 그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니까.
[…] 채플린은 수없이 오용된 ‘인간적인’이라는 형용사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유일한 영화인이다.
_장 뤽 고다르

채플린이 나오는 장면에서 나는 웃으며 아우성을 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 슬픈 현실에 고통을 느낀다.
_제리 루이스

그는 영화를 인간 정신의 위대한 표현으로 격상시켰고,
영화를 예술로 여길 수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희망에 빛을 주었다.
_장 르누아르

66년에 만에 공개된 ‘찰리 채플린’의 최초 그리고 최후의 소설,
<풋라이트>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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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누구나 큰 비용을 들이거나 힘들이지 않고
그 모양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적인 시계다.

하지만 이 시계를 이용해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기는 어렵다.
(하루나 이틀 정도 어긋날 수 있다)

그래도 약속을 준비할 수는 있다.

달이 꽉 찰 때마다 열리는 월례 행사를 위해서는
그 어떤 신문도 필요 없다.

이런 행사는 철기시대의 이탈리아반도와
서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달과 비교했을 때 태양은 요구하는 것들이 더 많다.

즉 태양의 운행과 아침이나 저녁노을 즈음에
뜨고 지는 별들을 관찰하는 데에는
필요한 것이 더 많다는 말이다.

예컨대 제도화된 기억이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갖춰졌다고 해서
그 결과가 그렇게 정확한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낮이 다시 길어진다는 주장은
몇 주일이 지나서야 마침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태양에 따른 역법을 사용하려면
그 결정을 관철시킬 수 있는 권력이 필요하다.

이때 자신을 단순히 시간 번역자인 것처럼
꾸미는 것이 시간 제작자의 술책이다.

곧, 천문학적인 시간 기호에 대한 지시를 통해
사회적인 시간 표준이 합법화되는 것이다.

외르크 뤼프케의 <시간과 권력의 역사 : 인간 문명 그리고 시간의 문화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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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가 ‘달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추석과 설날은 달을 보고 만든 날입니다. 태양력을 권력자의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한국에서 명절은 서민의 날입니다. 일할 시간과 학교갈 시간은 태양을 보고 정하지만 쉬는 날은 명절을 보고 정합니다.

실제 60분 단위로 잘라서 정하는 24시간은 노동일수와 그것의 댓가인 임금을 주기위해 정해진 시간입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 모두가 시간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높은 시계탑을 설치합니다. 마을이나 도시에 높은 곳에 시계를 설치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모두가 시간 관리를 하라고 손목에 시계를 채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의 족쇄를 찬 것처럼 약속을 지켜야 하고 지각하지 않기위해 아침마다 서둘러야 합니다. 이건 달의 시간도, 태양의 시간도 아닌 인간의 시간입니다.

인간은 이 오차를 줄이기위해 물리학적 지식을 동원합니다. 10억년에 1초의 오차가 나오는 시계를 과학적인 성과라고 부릅니다. 계속 시간을 쪼개나가는 것이 현대 과학의 목표이기도 하지요.

달이 가장 작아지는 날의 다음날을 새로운 ‘월’의 시작으로 삼은 우리의 선조들은 봄으로 바뀌는 때를 잡아 새로운 해의 시작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힘든 노동이 계속되는 날을 위해 휴식과 만찬으로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4번의 노는 날을 따로 정합니다. 이것이 24절기입니다. 단오에는 뭐를 하고 한식에는 무엇을 해야 하고 이렇듯 100가지 종류 이상의 노동이 필요한 벼농사를 지으며 버티기위한 자신만의 의례를 정합니다.

여러가지 의미도 새깁니다. 귀신을 내쫓기도 하고 머리를 감기도 하고 조상을 기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공동체의 의미있는 시간을 만들어냅니다. 마을이나 공동체 전체가 먹을 것을 같이해서 나누어먹고 보살피는 시간입니다.

‘세시풍속은 음력의 월별 24절기와 명절로 구분되어 있으며 집단적 또는 공통적으로 집집마다 촌락마다 또는 민족적으로 관행(慣行)에 따라 전승되는 의식, 의례행사와 놀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시풍속 [歲時風俗] (두산백과) 중에서

우리 대부분은 인간의 시간에 잡혀 살지요. 태양의 시간에 따라 계획을 세웁니다. 조금 더 자연적인 시간인 달의 시간은 의미가 달력의 휴일로 대체되고 말았습니다.

올해는 ‘달의 시간’을 여러분의 달력에 표시해보시면 어떨까요? 공동체의 시간, 서민의 시간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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