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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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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받는 대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다 털어놓는다.

스마트폰이 고문실을 대신한다.
빅브라더는 이제 친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빅브라더의 친절함이
감시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만든다.

벤담의 빅브라더는 보이지는 않지만
수감자들의 머릿속에 편재한다.
그들은 빅브라더를 내면화한다.

반면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아무도 감시받거나 협박당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시국가”라는 용어는
디지털 파놉티콘을 지칭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감정,
오웰의 감시국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유의 감정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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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빅브라더는 감시자를 말하고
파놉티콘은 감옥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감시센터를 말합니다.

벤덤의 빅브라더가 내면화 한다는 것은
수감자나 감시 대상자가 스스로 감시자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알아서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치즘이 만연했던 90년 전 독일은
사람들 한 명 한 명 안에 히틀러가 살고 있었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의 신민들은 모두 자유가 없고 답답합니다.
완벽하게 빅브라더가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하고
벗어나려는 연인이 결국 다시 빅브라더의 흉계에 의해
사랑이 깨지고 인간성이 상실되는 암울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감시자는 완벽한 감시 시스템을 갖추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감시받는 사람은 안보여주거나
혹은 원하는 것만 보여주려 노력하기때문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자유는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감시자의 입장에서는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놓게 됩니다.

자유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숨길 수록 강화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신비주의’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신은 무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예인과 정치인은 끊임없이 감추거나
보여주고 싶은 것만 드러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벽하게 감시 대상자가 되고 통제 대상자가 되니까요.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투명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국민과 소비자가 자유롭고 그들이 자유스럽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지요.

결혼하면 서로에 자유가 없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일상에서 뻔히 보이기 시작하면서 입니다.

북티셰 생각 –

p.s.

곧 북티셰에서 오프라인 책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시간되는 대로 말로 하는 책소개를 해보려구요.

원래 있지도 않지만 ㅜㅜ

얼마 안남은 ‘신비주의’가 없어진다는 게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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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선물이 있었다.

원형적인 세상의 시작,
우리 삶의 시작,
인류의 시작에
선물이 있었다.

따라서 감사는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감정이다.

굳이 더 설명하자면 ‘선물을 받았다는 느낌과
그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초창기 인류는
그런 원초적 감사의 감정을
사회적 경제적 관계 속에 구현했다.

돈의 역사에 대한 기술은
대부분 원시적 물물교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물물교환은 비교적 드문 일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경제적 교환방식은 ‘선물’이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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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인류가 탄생부터
약육강식에 의한 적자생존에서
살아남은 생명체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경쟁력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원시부족부터 이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뺏고 죽이고 거래하는
권력과 계산의 관계는

어쩌면

아주 최근의 인류가
만들어낸 발명품일지 모릅니다.

원래는
같은 지역에 살며
서로 가진 것을 ‘선물’하며
사는 생명체였습니다.

돈이나 금은
그 자체로 먹을수도 없고
쓸모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돈을 통한 거래가 초기에 있기는 했지만
선물을 주는 경제가 훨씬 더 발달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돈을 통한 ‘교환관계’를
발전된 체계이며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혹 이 ‘상식’이 오류일 수 있지 않을까요?

선물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지만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가격이 붙지 않은 물건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가격이 없는 선물은 이제 점점 가치를 잃어갑니다.

주는 기쁨과
받는 고마움이면 충분하고
꼭 준 사람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의 경제학 어떠세요?

우리가 살아왔던 과거는
교환해야 가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증여 즉 ‘주는 행위’ 하나로 가치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측정할 수 없는 마음 속에 생겨납니다.

돈을 통한 거래보다
마음을 통한 선물교환이

어쩌면

‘오래된 미래’ 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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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여를 주는 직장에서 벗어나 일을 하는 사람은
무시당하거나 조롱거리가 된다.

인간의 자율적 행위는
고용수준을 위협하고,
사회적 일탈을 일으키며,
국민총생산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부적절하게 불리는 ‘노동’일 뿐이다.

노동은 더 이상
인간의 수고나 노력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적 투자와
어울리지 않게 결합된 기괴한 요소를 의미한다.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가 느낄 수 있는 가치의 창조가 아니라,
주로 사회적 관계인 직업을 의미한다.

무직은 자신과 이웃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자유라기보다는
슬픈 게으름이 되었다.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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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렌서가 되어도
돈을 주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일해야 합니다.

사람은 여러 종류의 일과 노동을 하지만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돈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을 써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굶어죽는 상황이 됩니다.

즉 생존이 돈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돈으로 살아야 한다면
돈을 가져오는 ‘노동’만을 해야 합니다.

회사원이든,
프리렌서든
돈을 벌어야 하는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돈을 주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주는 돈 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돈을 줍니다.

이것을 ‘자본주의’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돈을 주어 일을 시켰는데
돈을 더 못벌어오게 되면?

우리는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더 많이 벌어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더 받습니다.

돈을 주고 일을 시켜 돈을 더 벌 수 있다면
우리가 돈을 주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회적인 가치’나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일들
혹은 하고 싶은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오직 ‘돈’만이 목적이라면
‘돈을 주는 사람’
즉 사용자가 되어야겠지요.

하지만 리스크도 많고
시장 환경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다보니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무직은 범죄가 되고
실업자는 살인죄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이런 사면초가를 우리는 ‘자본주의’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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