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굽는 남자, 북티셰

56_문학의 숲을 거닐다

하늘에 무지개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내 인생 시작되었을 때 그랬고
지금 어른이 돼서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내 살아가는 나날이
자연에 대한 경외로 이어질 수 있다면
장영희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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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올해 인사가 하나 더 남았네요.
메리 크리스마스는 지나가고
happy new year! 가 남았군요.

저도 인사 하나 하려구요.

‘올해 경외하는 당신들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55_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제가 보기에 귀하가
특히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교회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귀하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이
귀하처럼 믿음도 없고
믿으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용서할 것인지
아닌지 제게 물었습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있는데,

만약 누군가가 진지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호소를 하면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죄라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역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심에 귀 기울이고
양심이 시키는 대로 따른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선이나 악으로 느끼는
어떤 대상 앞에서
나름의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이 좌우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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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rthday!
JESUS CHRIST!!

54_꿈을 이루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맥도날드의 창업자 레이 크록이
사업을 처음 시작한 나이는 53세였다.
창업 당시 그는 당뇨를 앓고 있었으며
각종 질병에 시달렸지만 매일 아침
직접 청소를 했다.

샘 월튼은 44세에 창업했으며,
커널 샌더스는 65세에 사업에 실패하고
KFC를 창업해 재기에 성공했다.

킹질레트는 48세에
면도기의 대명사인 질레트를 창업했고,
메리 케이애시는
45세에 메리 케이 화장품을 창업했다.

소설가 박완서는 40세에 등단했으며,
화가 폴 고갱이
증권거래소 직원의 보장된 삶을 버리고
티히티 섬으로 떠난 것은 43세 때였다.

영화 [슈렉]의 원작자이자 ‘카툰의 왕’이라 일컫는
윌리엄 스타이그는 60세가 넘어 동화작가가 되었다.

전북 완주에 사는 70세의 차사순 할머니는
2종 보통면허 운전 시험에서 무려 959번 떨어진 후
960번 만의 도전 끝에 면허증을 손에 넣었다.

이처럼 늦은 나이에
자신의 꿈을 이룩한 대기만성형의 사람을
‘레이트 블루머(Late Bloomer)’라고 한다.

가능성을 스스로 닫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는 소중한 존재이다.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인가 큰일을 성취하려고 한다면
나이를 먹어도 청년이 되어야 한다.”

이형진의 <꿈을 이루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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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직 경험이 없어서…(20대)
지금 하는 일 열심히 해야하는 나이죠.(30대)
이젠 다른 일은 못해요.(40대)
이 나이에 뭘…(50대)
몸만 건강하면 되었지 뭐(60대)

우리 인생 최고의 핑계, 나이!!

53_익숙해지지마라 행복이 멀어진다

누구나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막연하게나마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막연하고 희미한 꿈이었습니다.
글 쓰는 걸 좋아했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강한 의지는 없었습니다.

그마나 그런 꿈이라도 꿀 수 있었던 건
결혼 전의 일입니다.
결혼 후에는 막연했던 작가의 꿈마저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생기니 내가 처한 현실 앞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벽면에 곰팡이 천지인
대여섯 평 되는 반지하 방에서 산다는 게,
아이에게도 아내에게도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눅눅하고 어두운 반지하 방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매일 매일 열심히 일했습니다.

물론 광고 카피라이터로 산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반복적인 야근은 물론이고
거미가 거미줄을 끊임없이 뽑아내듯
기발한 아이디어를 쏟아내야 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개씩 카피를 써야 하니
정말로 힘든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이
저를 버티게 했습니다.

저는 점점 생활인이 되어갔고
그러는 사이 꿈은 점점 먼 옛날의 불꽃놀이처럼
아련해져 갔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아내의 건강 문제로 회사를 그만둬야 했을 땐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한참 돈을 벌 나이인데,
한참 달려야 할 나이인데….
그 자리에서 멈춰야만 했습니다.
돈벌이는 없고 아내는 점점 더 고통스러워하고
아이는 울고.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 앞에서
점점 무기력해져만 갔습니다.
‘아, 끝이구나.’
그 생각이 불현듯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희한하게도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꿈이었습니다.

작가가 되고자 했던 꿈.
그 꿈은 예상치 못한 시기에
그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었지만
오히려 그 시기가 저를 작가로 인도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아내랑 아이를 곁에서 돌보며
밥벌이도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글쓰기라 생각을 한 것입니다.

몇 년 후, 열정을 다 바친 끝에
막연했던 꿈이 구체적인 현실로 실현되었습니다.

마침내 제 이름으로 책이 나온 것입니다.
그 성취감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물론 생활은 직장을 다닐 때보다 훨씬 더 쪼들렸지만
그래도 꿈을 이뤘다는 게 마음을 늘 풍요롭게 했습니다.

이처럼 삶의 전환점은
고난과 역경의 끝자락에서부터 오는 것 같습니다.

끝이라 생각했을 때 아이러니하게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김이율, <익숙해지지 마라, 행복이 멀어진다 : 어른이 되면서 놓치고 있는 것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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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공감한줄사전’인데
왜 이렇게 기냐구요?

이 글을 중간에 잘라내는 것은
일종의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2_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

눈길을 걸으면서도
뒤에 남는 발자국까지
걱정하지 말라.

사실 그냥 당신 갈 길만
유유히 바르게 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판단은
뒷사람의 몫이다.

설사 앞사람의 발자국을
똑같이 그대로
따라 간다고 할지라도
그건 같은 길이 아니라
뒷사람이 새로 가는 길일뿐이다.

원철 스님의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 중에서

141218_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인간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부정하고 싶은 것을
정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데이비드 실즈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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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데
남을 어떻게 알까요?

‘그냥 조금이라도 이해하자~’

뭐 이 정도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일겁니다.

그래도 오늘 북티셰의 비법 하나를 알려드리죠~~^^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물어보세요.
무엇인가 저 사람은 이렇다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저 상태는 안되려고 노력하는구나!!”

왜냐면~~

좋아하는 건 매번 바뀔 수 있지만
싫어하는 걸 좋아하기는 무척 어렵거든요~~^^

141217_조정래의 시선

인문학은 무엇일까요?

그건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발견’입니다.

‘나’뿐만이 아니고
‘당신’도 발견하고,
그리고
‘우리’ 모두를 발견하는 일,
그것이 인문학이 하는 일입니다.

그 발견은
곧 ‘인간의 제각기 다른 개성 존중’이고,
그것은 ‘서로 다른 능력의 존중’이 되며,
그것은 다시 ‘인간의 상호 가치 존중’으로 발전하며,
그것은 마침내 ‘인간 존엄의 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 아름다운 가치 실현이
우리들의 인식의 튼튼한 기둥으로 서게 되면
우리 사회의 나만 잘 되고자 하는
과도한 경쟁도 잦아들게 될 것이고,
개성을 무시하는 강압 교육도 없어지게 될 것이고,
인간 차별이나 인간 무시의 악습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반면에 자기 개성에 맞는 일을 자기 능력껏 해나가면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의 능력을 존중하고,
서로의 존엄을 보호하며
화목하게 살아가는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인간끼리,
인간답게 살아가는 그 길은
인문학 책들을 두루 읽어나가며
곱씹고 새김질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조정래의 시선> 중에서

141216_지평

그들은 자주 나란히 길을 가지만,
각자 다른 시간의 통로를 걷는다.

서로 말을 하고 싶어도
마치 수족관 유리로 가로막힌 것처럼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내가 저 여자를 좇아간들 무슨 소용인가.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같은 시간의 통로를 지날 것이다.

그러면
이 신시가지에서
우리 둘은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 <지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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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곳에 있으면서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관념의 속도가 다른 사람들일테죠…

이 상황에는 영혼없는 말들이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고
의미없는 말들이 그냥 나를 통과해 지나가 버립니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정말 ‘대화’하고 계신가요?’

141215_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네 형이 왔을 때 시험삼아 술 한잔을 마시게 했더니 취하지 않더구나. 그래서 동생인 너의 주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네 형보다 배도 넘는다 하더구나. 어찌 글공부에는 이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아비를 훨씬 넘어서는 거냐?

이거야말로 좋지 못한 소식이구나. 네 외할아버지 절도사공은 술 일곱잔을 거뜬히 마셔도 취하지 않으셨지만 평생 동안 술을 입에 가까이하지 않으셨다. 벼슬을 그만두신 후 늘그막에 세월을 보내실 때에야 비로소 수십방울 정도 들어갈 조그만 술잔을 하나 만들어놓고 입술만 적시곤 하셨다.

나는 아직까지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없고 내 주량을 알지도 못한다. 벼슬하기 전에 중희당에서 세번 일등을 했던 덕택으로 소주를 옥필통에 가득 따라서 하사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다 마시면서 혼잣말로 “나는 오늘 죽었구나”라고 했는데 그렇게 심하게 취하지 않았다.

또 춘당대에서 임금을 모시고 공부하던 중 맛난 술을 큰 사발로 하나씩 하사받았는데, 그때 여러 학사들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정신을 잃고 혹 남쪽을 향해 절을 하고 더러는 자리에 누워 뒹굴고 하였지만,

나는 내가 읽을 책을 다 읽어 내 차례를 마칠 때까지 조금도 착오없게 하였다. 다만 퇴근하였을 때 조금 취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랬지만 너희들은 지난날 내가 술을 마실 때 반잔 이상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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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요 부분을 읽을 때마다 혼자 웃습니다.
이 삼부자는 정말 술이 쎈거죠…
그러니까 그 중에 자기가 술 젤 세다고 자랑하는 게 아버지인거에요.
치사한 형은 동생의 주량을 고자질한 게 된거죠.

12월이 되면 술자리가 늘어날텐데요.
꼭 수십방울만 들어가는 술잔에 드세요~~^^
양주 드시라는 이야기겠죠?

그래도 이 책 한번 읽어보세요. 요즘엔 교과서에도 실려있습니다.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열 여덟해를 강진의 유배지에서 살면서 자식들에게 꼬박 꼬박 희망을 적어서 보내줬던 책입니다.

슬프고 안타까워야 하는데 전 이 책만 보면 웃깁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소리가 많은,
그렇지만 근엄한 아버지 이야기거든요.

다산의 잔소리는 만만치 않지만 하나도 버릴 것은 없습니다.

2014년이 한 달 남았을까요?
아님 2015년이 한 달 남았을까요?

자꾸 세보며 확인하고 체크하지 마시고 (맘만 상하니 ㅜㅜ)
내일을 어떻게 살까만 생각해보기로해요~~^^

다산과 함께~~

041214_연금술사

그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해버린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들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 든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한다.

사람들에겐 인생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기준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현실로 끌어낼 방법이 없는
꿈속의 여인같은 것이니 말이다.

파올로 코엘료, <연금술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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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그들의 삶 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

‘꿈속의 여인’

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

지구와 충돌하는 혜성처럼

온몸으로 부딪히는 그런 삶의 우연!

파올로 코엘료는
소설에 잠언집을 끌어들이는
연금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스토리를 알더라도
계속
그 소설을 읽게하는 비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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